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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2 14:49

미야자와 겐지 - 비에 지지 않고


미야자와 겐지 - 비에 지지 않고


비에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보라와 여름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을 가지고
욕심도 없이
절대 화내지 말고
언제나 조용히 웃는 얼굴로
하루 현미 너 홉과
된장과 나물을 조금 먹고
모든 것을
자기 계산에 넣지 않고
잘 듣고 보고 알아서
그리고 잊어버리지 말고
들판 소나무 숲속 그늘에
조그만 초가지붕 오두막에 살며
동쪽에 병든 어린이가 있으면
가서 간호해주고
서쪽에 고달픈 어머니가 있으면
가서 그의 볏단을 져다드리고
남쪽에 죽어가는 사람 있으면
가서 무서워 말라고 위로하고
북쪽에 싸움과 소송이 있으면
쓸 데 없는 짓이니 그만 두라고 하고
가뭄이 들면 눈물을 흘리고
추운 여름엔 허둥지둥 걸으며
모두한테서 멍텅구리라 들으며
칭찬도 듣지 말고
괴로움도 깨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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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2 11:10

김경미 - 비망록


김경미 - 비망록


햇빛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시 쉴 즈음, 깨어보니 스물네살이었다. 신(神)은, 꼭꼭 머리카락까지 졸이며 숨어있어도 끝내 찾아주려 노력하지 않는 거만한 술래여서 늘 재미가 덜했고 타인은 고스란히 이유없는 눈물 같은 것이었으므로.

스물네 해째 가을은 더듬거리는 말소리로 찾아왔다. 꿈 밖에서는 날마다 누군가 서성이는 것 같아 달려나가 문 열어보면 아무 일 아닌 듯 코스모스가 어깨에 묻은 이슬밭을 툭툭 털어내며 인사했다. 코스모스 그 가는 허리를 안고 들어와 아이를 낳고 싶었다. 석류 속처럼 붉은 잇몸을 가진 아이.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네 살엔 좀 더 행복해져도 괜찮았으련만. 굵은 입술을 가진 신두목 같은 사내와 좀 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으련만. 이리 많은 남은 행복과 거짓에 이젠 눈발 같은 이를 가진 아이나 웃어줄는지. 아무 일 아는 듯 해도.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엔들 걷지 못하랴. 문득 깨어나 스물다섯이면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아무에게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

*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1989년 실천문학사

* 시라는 것을 직접 쓰고 주위에 공개했을 때, 시는 곧 나의 최후진술이라는 비장함에 너무 딱딱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시마다 최후진술이면 최후의 진술이 주는 무게감이 시가 늘어날수록 낮아져서 퇴고에 퇴고를 거듭하면서 뭔가의 허전함과 부족함에 늘 불안하고 만족스럽지 못했던 시간들. 그 시간들을 정면으로 돌파했는지 에둘러 돌아왔는지는 지금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디쯤 최후의 진술을 흘렸다는 것이. 그 비밀을 품고 있다는 것이 그 시간들을 증명하는 유일한 흔적이기에 소중하고 또 소중합니다.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해두는 글은 일기도 있고 메모도 있지만, 쓸쓸한 바람 냄새 나는 것은 비망록이 딱입니다. 괜히 있어보이게 하는 능력. 이것도 문학의 큰 능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기 고백의 낮은 소리로 스스로를 온전하게 쳐다보는 일. 그 조용한 시간을 맴도는 상상의 여행중에 번뜩이는 구절을, 내가 생각해도 이건 꽤 근사한 말이라는 것을 옮겨 적은 것이 비망록입니다. 생각해보니, 일기와 시 노트가 저의 비망록입니다. 사진을 보면 기억이 흐릿한데, 술마시며 옛일을 왁자지껄 떠들어도 그닥 감정이 살아나지 않는데, 일기와 시 노트를 읽으면 그 풍경이 그 감정들이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더욱 매력적인 것은, 매번 다른 해석과 접근일지라도 온전한 나의 시간처럼 분명하게 기억된다는 것입니다. 비망록에 남긴 글은 나를 아직도 날아오르게 합니다. 나는 언제까지 날고 싶어서 비망록의 글에 마침표를 찍지 않습니다.

그 긴 여행중 어딘가에 흘려 놓은 최후진술을 찾아봐야겠습니다. 오랜만에 거울 앞에 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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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0 11:45

조말선 - 거미

조말선 - 거미


나는 생각한다
가랑이가 낳은 집에 대해서
유행에 둔한 건축법에 대해서
실오라기 하나로 이어온 가계에 대해서
이슬의 동그란 노크에 대해서
거꾸로 걸어가는 사람들에 대해서
거미줄에 포박된 우주에 대해서
나는 가랑이로 생각한다
나를 낳은 기둥과 기둥에 대해서
폐허에 찍은 내 낙관에 대해서
외줄에 매달린 생애에 대해서
매번 마지막인 사랑에 대해서
창밖에 내걸린 사랑의 수의에 대해서
마지막을 유감없이 처리하는 내 본성에 대해서
나는 가랑이로 배설한다
족보와
사랑과
무덤과


* 조말선 시집 <매우 가벼운 담론> 문학세계사. 2002년

* 거미에 대한 상상적 연관과 이미지의 변주는 이 시를 읽는 재미입니다. 그것은 각자의 몫으로 남겨두어도 좋습니다. 시인의 특권이 설명하지 않는 것이라면, 독자의 특권은 설명하지 않은 것들의 끝간 데 없는 상상 아니겠습니까.
어떤 사물에 대한 관찰과 관심과 의미의 사회적 확대와 자의식으로의 심화는 일반적인 시의 순환구조 속에서, 거미는 무엇 무엇을 상징한다고 규정할 수도 있고, 시골 외가집 재래식 화장실에서 무서움과 지루함과 조급함으로 웅크리고 앉아 있는 동안 쳐다본 거미 한 마리 그 자체일 수도 있겠습니다. 마찬가지로, 호기심과 악동짓으로 거미줄을 끊거나 헤집었을 때 아둥바둥하며 곤란해 하는 거미의 모습도 무엇 무엇을 상징할 수도 있고, 얼떨결에 천재지변의 재앙을 맞은 거미 한 마리 그 자체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시인의 특권이 하나 더 추가됩니다. 독자들의 끝간 데 없는 상상에 대해서 특별히 해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에 대응하는 독자의 특권은 단연, 제 맘 같지 않은 시인들에 대한 가차없는 무관심과 쌩까기 되겠습니다. 조말선 시인의 다른 시집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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